AUG.
7, 2015
번역자: 박성남
THE
history of today’s climate change debate may
have begun on Feb. 7, 1861. That day, an Irish physicist named John Tyndall, a
professor of natural philosophy, delivered the annual
Bakerian Lecture to the Royal Society in London.
현대의 기후 변화 토론의 역사는 아마
1861년 2월 7일부터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그날, 아일랜드의 자연철학 교수인 존 틴들이라는 물리학자가 영국 왕립학회 회원들을 대상으로 연례 베이커(수상강연) 강연을 했습니다.
Dark-eyed
and quick-witted, Tyndall was a dazzling figure who drew huge audiences to his
public lectures on lively new subjects like glaciation, radiation and sound. “I
never saw so large an attendance in the rooms of the Society,” he wrote in his
journal that night. Even Alfred Tennyson, the poet laureate, sat amid the “many
remarkable men present.”
눈 색이 짙고
두뇌회전이 빠른 틴들은 빙하 작용, 방사선 그리고 소리와 같이 새로운 과목(주제)에 대한 공개강연에서 대중의 큰 관심을 끄는 각광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영국 왕립학회에서 그렇게 많은 출석자를 본적이 없습니다”라고
그는 그날 저녁 그의 학술지(매일 기록서)에 적었습니다. 국민 시인인 앨프리드 테니슨 조차도 “많은 주목할만한 사람들” 가운데 앉아 있었습니다.
Tyndall
had news. He revealed that for two years he had been studying the heat-absorbing
properties of gases. He realized that for the earth’s atmosphere to maintain
its steady temperature, certain gases must be capable of trapping radiant heat.
This inquiry, he said, was “perfectly unbroken ground.”
틴들은 새로운 소식이 있었습니다.
그는 가스들의 흡열 성질에 대해 2년 동안 연구했다고 밝혔습니다. 그는 지구의 대기가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특정한 기체들이 방사열을 가두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 연구는 “전혀 연구되지 않은 분야”입니다 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His
experiments had shown that gases like oxygen, hydrogen and nitrogen retained
very little heat. But others, particularly carbon dioxide, absorbed surprising
amounts of radiation — “nearly 100 times as much as oxygen,” he said.
그의 실험은 산소, 수소 그리고 질소와 같은 기체는 매우 적은 열을 보유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특히 이산화탄소와 같이 다른 기체들은 놀랄 정도로 많은 양의 복사를 흡수합니다.
–“그 흡수량은 산소의 100배에 이릅니다”라고 그가 말했습니다.
For the sharp
minds in the hall, the implication of Tyndall’s discovery was clear. The higher
the concentrations of absorptive gases in the atmosphere, the higher
atmospheric temperatures would be. Thus was laid the theoretical foundation for
climate science — though few could have envisioned that, more than 150 years
later, Tyndall’s discovery would be one of the great political debates of the day.
홀 안의 예리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틴들의 발견이 내제하는 바는 분명했습니다. 대기의 흡열형 기체의 농도가 높을수록, 대기 온도가 높아질 것입니다. (이산화탄소의 흡열 농도가 높아 현재
지구의 온도가 상승함을 의미) 이는 기후 과학의 이론적 기틀이 되었습니다. – 그 당시에는 누구도 그 것을 생각할 수 없었지만, 150년 이후에
틴들의 발견이 지금 시대의 큰 정치적 논쟁 꺼리가 되었습니다.
Tyndall’s
was not the only contribution that year to our understanding of earth’s climate
and its threats. That bleak winter week in 1861 was a stormy one. As
Tyndall spoke, Atlantic gales were tearing across England, from the Irish coast
to the North Sea. A 10-minute walk from where Tyndall was giving his lecture in
London, a veteran of the Royal Navy, Robert FitzRoy, was embarking on an
audacious meteorological experiment.
틴들의 발견은
그 해에 지구의 기후와 그 위협을 이해하는 유일한 기여가 아니었습니다. 1861년 그 음산한 겨울 한
주는 강력한 폭풍의 계절이었습니다. 틴들이 말한 대로, 대서양
강풍이 영국을 가로 질러 아일랜드 연안에서부터 북해까지 지나갔습니다. 틴들이 런던에서 강연한 곳으로부터
걸어서 10분 떨어진 곳에서 영국 해군의 재향 군인 로버트 피츠로이가 대담한 기상학 실험에 착수했습니다.
Tyndall
knew FitzRoy. They mixed in London’s intellectual circles and had served on the
same British Association committee. For the previous seven years, too, FitzRoy
had been making a name for himself, as head of the British government’s new
Meteorological Department.
틴들은 피츠로이를 알았습니다. 그들은 런던의 지식인 사회에서 교류했고,
영국 학술 협회 위원회에 참여하여 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지난 7년 동안 피츠로이 또한 영국 정부의 새로운 기상청의 청장으로써 그의 이름을 드높이고 있었습니다.
The
initial aim of this department was to collate wind data from ships’ logs and
plot the findings on nautical maps. Mimicking a similar initiative in the
United States, the government hoped that British captains could plan more
intelligent routes, making merchant shipping more efficient. But then FitzRoy
changed tack.
이 부처의 초기
목표는 선박기록에서 풍랑 정보를 수집하여 항해지도에 그 결과를 표시하는 것이었습니다. 미국의 유사한
사업을 모방 하여, 영국 정부는 영국의 선장이 상선들의 항해가 더욱 효율일 수 있는 더 지능적인 항로를
계획할 수 있기를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피츠로이는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He
was an energetic, independent-minded man, who three decades earlier had
captained the Beagle during its celebrated circumnavigation with the young
Charles Darwin aboard. Around Cape Horn and the bleak coastline of Tierra del
Fuego, FitzRoy had studied weather patterns, learning to predict sudden
atmospheric changes.
그는 30여년 전 어린 챨스 다윈과 함께 유명한 일주를 한 비글호의 선장이었던 열정적이고 독립적 생각을 가진 남자입니다. 케이프 혼과 티에라 델 푸에고 제도의 음산한 해안선 근처에서 피츠로이는 일기변화를 연구하여 갑작스런 대기 변화를 예측하는 방법을 공부했습니다.
Meteorological
theory had progressed during his career, but to little practical effect. The
sky was considered by many a divine realm, not a place for science. So storms
continued to blow over Britain without warning, sinking ships and fishing boats
as they passed. In the 1850s, more than 1,000 sailors drowned off the British
coast each year.
기상 이론은 그의 직장생활 동안 발전해 왔습니다. 하지만 실질적인 효과는 거의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늘을 과학의 영역이 아닌 신성한 영역으로 취급했습니다.
그래서 영국에 경고도 없이 태풍이 계속해서 오면서 배와 어선들이 가라앉혔습니다.
1850년대 매년마다
1000명 이상의 영국 선원들이 익사했습니다.
For
the admiral, this was an outrage. By February
1861, he had the authority to act. At his office in Whitehall, he studied
weather reports from the coast. If he detected a storm, he would relay a
telegram to the relevant port, where a warning signal could be hoisted in the
harbor. His first storm warning was sent within hours of Tyndall’s lecture.
제독이 봤을 때, 이는 어리석은 짓이었습니다. 1861년 2월경 그는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화이트
홀에 있는 사무실에서 그는 연안의 기상 보고를 공부했습니다. 만약 그가 폭풍을 발견했을 시 그는 경고신호를
게양할 수 있는 연관된 항에 전보를 보냈습니다. 그의 첫 폭풍 경고는 턴들 강의 시간 내에 보내졌습니다.
Even
with the new communications technology, it was, he wrote, a race “to warn our
outpost before the gale reaches them.” It was an exhausting undertaking. All
the telegraphed slips were read, collated and analyzed. Everything was
time-sensitive.
새로운 통신기술을 이용하더라도 “강풍이 도착하기 전에 전초기지에 경고하는 것”은 하나의 경주라고 그는 적었습니다. 이것은 진을 빼는 일이었습니다. 모든 전보용지가 읽히고 수집되고 분석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시간싸움 이었습니다.
Often,
the warnings turned out to be right, saving lives. FitzRoy became a national
celebrity, called the “Clerk of the Weather” in the newspapers. Within six
months, his storm warning project had evolved into full-blown weather predictions
issued under a new term of his own: forecasts.
가끔 경고는 맞았고 많은 생명을 구했습니다.
피츠로이는 국가적 명사가 되어 신문에서 “날씨의 사무원”이라고 지칭되었습니다.
6개월 안에,
그의 태풍 경고 사업은 그 자신이 만든 새로운 용어(예측)로 발표되는 완전 기상예측으로 발전했습니다.
Despite
huge popular appeal, they remained highly controversial. Religious men doubted
whether anyone could pretend to know the mind of God, while scientists attacked
the admiral’s lack of theory and penny-pinching members of Parliament
complained about the cost of telegraphy. He struggled with the diplomatic
challenge of securing data from rival powers like France, and with the
inevitable, sometimes costly failures of his weather forecasting.
큰 인기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많은 논란에 휩싸였습니다. 과학자들은 제독의
이론의부실함을 공격하였고, 돈 한 푼에 민감한 의원들은 전신의 비용에 불만을 표시하는 한편, 종교인들은 누군가가 신의 마음을 아는 척 하는 것을 의심했습니다. 그는
프랑스와 같은 경쟁국으로부터 자료를 획득하기 위한 외교적 어려움과 씨름했으며, 피할 수 없는 기상 예측의
실패에 따른 비용으로도 고군분투하였습니다.
The
burden became too much. Depressed and ailing, on April 30, 1865, he locked
himself in his dressing room and cut his throat with a razor.
부담은 매우 커졌습니다. 1865년 4월 30일
우울하고 병들어 그는 옷장 안에 그 스스로를 가두고 면도기로 목을 그었습니다.
Today’s
climate change debate has evolved much like the forecasting controversy of the
1860s. Similar questions arise: How can we trust scientists to warn of coming
danger? What economic costs should we expect?
요즘의 기후 변화 토론은
1860년대의 일기예보 논란과 비슷하게 진전되고 있습니다. 비슷한 질문이 생깁니다:
우리는 어떻게 다가오는 위험을 경고하는 과학자들을 믿을까요? 얼만큼의 경제적 비용을 우리는 생각해야 할까요?
These
climate disputes continue to resonate in part because meteorology is among the
most difficult of sciences. It is one of the few fields of applied science that
demands prediction. As any prediction involves uncertainty and uncertainty is
anathema to scientists, meteorology seems condemned to exist in a fraught
intellectual space.
기상학이 가장
어려운 과학 중 하나이기에 이 같은 기후변화 논쟁은 지속되고 있습니다. 이는 예측을 요구하는 몇 안
되는 응용 과학들 중 하나입니다. 어떤 예측이든 불확실성을 내제하고 불확실성은 과학자들이 싫어하기 때문에
기상학은 걱정투성이의 지성 공간에서 존재하는 자체가 비난 받는 것으로 보입니다.
Despite
FitzRoy’s tragic end, history has judged him favorably. The science of
forecasting that he pioneered has become an ingrained part of modern life,
right down to the weather app on our smartphones. The British Met Office has
its headquarters on FitzRoy Road, and in 2002, one of the zones in the BBC
shipping forecast was renamed FitzRoy in his honor.
피츠로이의 안타까운 결말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그를 좋게 평가했습니다.
그가 개척한 기상예측의 과학은 스마트폰의 기상 어플리케이션에 이르기까지 현대 생활의 뿌리깊은 부분이 되었습니다. 영국 기상청 본부는 피츠로이 거리에 있습니다. 그리고
2002년 BBC 배송 예보의 영역 중 하나는 그의 명예에 힘입어 피츠로이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More
than a century and a half after Tyndall’s greenhouse gas lecture and FitzRoy’s
first storm warning, we again find ourselves in a time when meteorological work
is often criticized as costly and inaccurate. Yet today’s climate scientists
can take heart from FitzRoy’s story. His work is viewed as a triumph of
practical science against fierce opposition, and a celebration of that rare
sort of human will we need to make change possible.
틴들의 온실가스 강의와 피츠로이의 첫 태풍경고 이후 한 세기하고도 반이 더 지난 지금, 우리는 기상관련 일의 비용과 불정확성으로 비판을 다시 종종 받아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상 과학자들은 피츠로이의 이야기로부터 그의 마음을 전달받을 수 있습니다.
그의 일은 험악한 반대에 대항한 실용 과학의 대성공으로 간주되고, 또 변화를 가능하게 만드는 희소한 인간의 의지를 기념하는 것으로 비춰집니다.